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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을 질주하오
- 이상의 삶과 죽음
우리 문학인 가운데서 이상만큼 자신의 존재를 소설과 시 속에 각인해 넣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것은 이상이 동시대인들과는 달리 자의식이 강한, 자의식을 파먹고 사는 작가였으며, 그의 시나 소설은 그 자의식의 피 흘림이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대번에 그의 이름을 떨치게 된 소설 「날개」의 첫 구절,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도 그 예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는 표면적으로 약관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일본의 천재 소설가 아쿠다가와 류노노스케 지만, 그 아쿠다가와는 그의 가면을 둘러쓴 이상 자신이기도 하다. 이상은 자신과 아쿠다가와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박제’란 말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상은 이때 이미, 자신의 삶이 거의 박제가 되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 그의 문학 역시 ‘박제’ 같은 미완성품으로 읽혀지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경에서 쓴 마지막 소설에서도,
墓碑銘 이다. 一世의 鬼才은 이상 그 通生의 大作「終生記」一篇을 남기고 一千九百三十七年 三月 三日 未詩 여기 白日 아래서 그 파란만장(?)한 生애를 끝맺고 문득 卒하다.
라고 써넣었다.
자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쓴 사나이. 그리고 자신의 이름 앞에 ‘일세의 귀재’라고 수식한 사나이.
그는 그의 예찬자의 하나인 김기림이 말했듯이, 태어나서 우리 문학사를 50년 앞당겼고, 죽어서 문학사를 50년 후퇴시켰다고 말해도 될 존재였다. 그의 죽음은 ‘한 개인의 生理의 비극’만이 아닌 ‘縮刷(축쇄)된 한 시대의 비극’ 이었다.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의 시나 소설은 난해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한결같이 피해망상의 소유자들이 땅에 발바닥이 닿는 것도 두려워하며 숨 쉬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피해망상적인 주인공을 거느리고 다니는 이상을 , 김기림은 주피터라고 했으며, 이어령은 이카루스라 했고, 박용철은 ‘인류 있은 이후에는 제일 슬픈 소설을 쓴 사람’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이름 붙이기는 우리 문학사가 우리말로 씌어지는 한은 앞으로도 계속되어 나갈 것이다.
이상이 태어난 곳은 사직동의 누옥. 태어난 날은 1910년 음력8월 20일 . 무학인 김연창과 박세창 사이에서였다. 부친은 결혼 하자마자 분가해서 이발사 등을 하며 궁핍하게 살았으므로 이상은 두 살 때부터 아들이 없는 백부 김연필에게로 가. 그 집에서 자라고 배웠다. 그는 백부가 세상을 뜬 다음해 1933년 까지 그곳에서 기거했다.
백부는 자수성가하여 한때 평안북도 자성에서 보통학교 교원을 지낸 적도 있었고, 총독부 관리직도 역임했다. 그랬으므로 이상의 교육에는 열과 성을 다 바쳤던 듯하다. 어린 이상은 백부의 기대에 부응해서 7세 때 신명소학교에 들어가서, 동광학교와 보성고보를 졸업할 때까지 최우수 성적을 유지했다. 조선인으로서는 들어가기 쉽지 않은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백모인 김영숙은 또렸한 기억력으로 말한다.
“해경 (이상의 본명)이는 너무 똑똑하고 공부밖에 몰랐다. 성격은 괄괄한 편이었다.”
이상은 보성고보와 경성공고 시절 그림 잘 그리고 도안 잘하는 학생으로 알려졌다. 1924년 에는 (이 해에 이상이 다니던 동광학교는 보성고보와 합병, 보성고보 학생이 된다) 누이동생 옥희를 모델로 그린 「풍경」이 교내미전에서 우등상을 받았으며, 1929년 에는 건축 ․ 회계 전문잡지인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응모, 1 등과 3등을 한꺼번에 차지했다. 또 1931년 에는 선전에 「초상화」을 출품, 입선되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경성공고 시절, 이상의 집에서 하숙하며 이상과 한 방을 썼던 문종혁의 증언에 따르면 밤 깊도록 열심히 시도 쓰고 있었다고 한다. 활자 같은 꼼꼼한 글씨로 노트 가득 시를 써넣어 보물처럼 간직했다 한다. 그러니까 그때 벌써 이상은 식민지 지식인 에게 주어졌던 문예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화가가 될 것으로 예측한 가운데 이상은 1929년 경성공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조선 총독부토목과의 기사 (보통관)로 취직해 들어간다. 일설에는 그 성적이면 철도국 기사 (고등관)가 될 수 있었으니 조선인이기 때문에 보통관 자리로 앉게 되었다고도 하고, 일설에는 또 그의 백부의 연줄로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어쨌거나, 이 기사 자리에 그는 그다지 불만이 없었던 듯하다. 오전 일찍 끝내버리고 오후에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소설들을 읽으며 보냈다. 이때 그가 얼마나 일을 속성으로 끝내고 문학서적만 붙들고 있었던지, 일본인 상관이 어느날,
“군은 왜 직장에서 소설만 읽나?”라고 힐난하였다. 그러자 이상은 작업일지를 들고 와 보였다. 나무랄 데가 없는 일솜씨였다.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그의 위치는 점점 잡혀가고 있었다.
바로 그즈음이었다. 사실 이때 그는 직장일을 하면서 열심히 일문시를 써서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하고 있었다. 「이상한 가역반응」「파편의 경치」「수염」등이 그때 발표한 작품들이었다.) 안정의 뒤를 따라서 그의 파멸을 식고하는 두 사건이 찾아오고 있었다. 첫째는 그 정신적 ․ 경제적 지주였던 백부가 뇌일혈로 사망한 일이요, 둘째는 경성제대 병원에서 폐결핵 3기가 선고된 것이다. 폐병 3기라면 당시에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는 백부 대신 할머니와 백모, 그리고 그의 부모를 부양하는 책임을 떠맡지 않으면 안 되었고, 살길을 찾아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80세의 시모는 해경에게 재산을 물려주어 장사를 하도록 해야겠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이듬해 나는 통인동 집을 넘겨주고 계속 전셋집으로 나갔어요.”
백모 김영숙의 말이다.
이상은 집안에 대한 책임과 내면의 절망을 털어내고자 소학교 동창인 꼽추 화가 구본웅과 성천 온천으로 요양을 떠났다. 흰 구두를 신고, 카키색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검은 중절모를 깊숙이 눌러 쓰고 꼽추와 같이 성천 거리에 나서자 꼬마들이 줄지어 따라왔다. 서커스단이 온 것으로 아이들은 여긴 것이다. 이 절망과 착각으로 인한 진풍경은, 그로 하여금 뒤에 수필 「귄태」에서 묘사하게 되는, 두메산골 어린애가 심심해서 풀숲에 느릿느릿 똥을 누고 다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였고, 그곳에서 기생 금홍이를 만나, 대번에 ‘제비’라는 다방 경영을 착수하게 했다. ‘제비’는 통인동 집을 판돈으로 종로 1 가 (지금의 한일관 부근)에 문을 열었다. 이상은 ‘제비’뒤의 골방에 금홍이와 살림을 차렸다. 밤이고 낮이고, 낮이 밤인 전도된 생활이었다. 2년을 못 견디고 ‘제비’가 거덜났다.
그는 인사동에 다시 ‘카페 쓰루’를 열었으나, 이것 또한 1년을 못 넘기고 문을 닫았으며, 세 번째로는 그 자신의 내부설계로 종로 1가에 ‘식스나인 (6.9)’ 이라는 다방을 열었으나 곧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식스나인’이란 남녀의 성도착 행위를 가리킨 것으로서, 자신의 절망적인 삶에 대한 야유이자 아이들만한 성기를 가지고 있었던 이상의 여성 콤플렉스의 발로였다. 실제로 이상은 여성들에게 저자세였다. 첫애인 금홍에게도 그는 남성으로서 굳건한 편이 못 되었다. 이것은 ‘제비’생활 때도 그랬고, 그녀가 이성을 버리고 나갔다가 1년 후 다시 돌아왔을 때도 말없이 그녀를 맞이한 것으로 보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상이 수염을 창대같이 기르고 밤을 낮같이 사는 퇴폐적인 인간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돈을 못 벌었으되 돈을 낭비한 축은 아니었다. 어디서 목돈이라도 들어오면 호주머니 깊숙이 넣어 집에 갖다 주었다. 그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한 자리 술은 물론 커피 한 번 시원하게 사지 못했다. 그가 술을 산 것은 싸구려 선술집에서 뿐이었다. 「오감도」라는 난해시를 『조선중앙일보』 에 연재한 것도 이 궁핍과 절망에 쫒기는 때였다.
오감도(烏瞰圖)-시제일호(詩第一號)
13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適當)하오.)
제(第)1의아해(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第)2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3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4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5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6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7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8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9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10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11의아해(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제(第)12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제(第)13의아해(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人)의아해(兒孩)는무서운아해(兒孩)와무서워하는아해(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다른사정(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中)에1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운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2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운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2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워하는아해(兒孩)라도좋소.
그중(中)에1인(人)의아해(兒孩)가무서워하는아해(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適當)하오.)
13인(人)의아해(兒孩)가도로(道路)로질주(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렇게 시작되는 이 시는 막다른 골목을 질주하고 있는 그의 내면풍경일 것이다. 이 시는 ‘무서워하는 아이’와 ‘무서운 아이’가 동일하여도 괜찮다는 트릭을 쓰고 있는데, 실제로 현대인, 특히 이상과 같은 현대인에게는 ‘무서워하는 아이’와 ‘무서운 아이’가 동일인으로서 함께 내면에 내재해 있다. 이상은 그의 자의식이 자신으로 하여금 자해나 살인을 감행케 할 수도 있는 자의식의 공포 때문에 세계를 무섭다고 하는 것이며, 골목을 옆도 보지 않고 질주하는 것이다.
이 비참한 자의식을 서정주는 「소영위제(素榮爲題)․3」의
달빛이내등에묻은거적자줄에앉으면내그림자에는실고추같은피가아물거리고……
에 너무나 잘 담겨 있다고 보고 있다. 거적을 덮고 누운 거지와 같이 누추한 자신에게 달이 비치면 실고추 같은 절망의 핏자국이 아물거린다는, 시로서는 너무나도 빼어난, 식민지 지식인의 현실로서는 너무나 처참한 아픔을 이 시구와 그의 시들, 소설들은 갖는다.
그러나 식민지 지식인의 처참한 자의식도, 1937년 동경으로 도망치듯 갔다가, 거기서 불온선인으로 체포되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이미 죽음에 직면한 이상을 벗들이 동경제대 병원에 입원시켰다.
숨을 거두기 직전, 이상은 “레몬을……” 했다. 벗들이 거리로 달려나가 레몬을 사가지고 왔을 때는 이상은 마지막 숨을 모으고 있었다. 벗들은 그의 사면(死面)을 데드마스크로 떴다. ‘이리하여 나의 -終生은 끝났으되 나의 -終生記는 끝나지 않았다’고 자신이 쓴 것처럼 그는 죽었고, 그의 작품만이 우리 문학사의 몫으로 남게 된다.
덧)참으로 난해하고 어려운 내면의 세계이다.
그는 스스로가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나 있듯이 (제 13인의 아해가
막다른 길로 달려가지 아니하여도 좋소) 라는 단절을 꾀하며 일생을 접을 순간을 기다린 것은 아닐지...
나는 한때 지독할 정도로 (이상)의 추종자였다. 물론 지금도 좋아하고 그의 생을 못 견디게
그리워하고 애석함을 갖는다.
세계적으로 자의식적인 작가들을 4명으로 압축하면 (랭보, 다자이 오사무, 뒤카스, 이상)이다.
그러나 위 4명의 작가들을 아무리 살펴봐도 (이상)만큼 일생을 리얼하고 패러독스한 삶을 즐긴 작가는 없다.
한때 그의 삶이 부러워 이십 육년 칠 개월의 삶을 끝을 생을 접을 거라고 했던 치졸한 용기는 지금 어느 곳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지... 이곳에 다 옮기지 못한 (이상)의 세계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다시 올릴 것을 약속하며
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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